책과 영화
-
역사 속 숨은 이야기: 프레드 윌슨의 《박물관 채굴하기》책과 영화 2023. 12. 18. 17:57
여기, 빛나는 은 공예품들이 있다. 은으로 만들어진 주전자와 와인잔에는 뚜껑, 손잡이, 받침 등 모든 부위에 정교하게 장식이 새겨져 있다. 주전자와 와인잔을 진열해 놓는 것만으로도 눈이 즐거울 테지만, 와인을 따라 마시면 새겨진 장식이 더욱 화려하게 빛날 것 같다. 그리고 은 공예품 사이에 놓인 검은색 물체는 노예에게 채웠던 족쇄이다. 위의 구성은 작가이자 사회운동가인 프레드 윌슨(Fred Wilson, b)의 라는 작품이고 볼티모어시에 있는 메릴랜드 역사 학회(Maryland Historical Society, MHS) 갤러리에 전시되었던 것이다. 은 공예품들은 1793년부터 1880년 사이에 제작된 유물들이며 노예 족쇄는 프레드 윌슨이 볼티모어 지역창고에서 발견하여 함께 배치했다. 보통의 공예 전시라..
-
뼈와 사랑과 바이브레이터와 권력까지: 100가지 물건으로 다시 쓰는 여성 세계사책과 영화 2023. 11. 10. 21:33
여성의 삶과 관련된 물건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변화상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선사시대부터 전통사회, 산업혁명 시대, 현대에 걸쳐 여성의 삶에 각 물건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섹슈얼리티, 가정, 산업, 문화, 예술, 노동 등 다방면에서 다룬다. 대개는 여성의 역사와 관련된 물건이라고 했을 때 공예품이나 조리도구 정도를 떠올리지만, 이 책에서는 최초의 여성 화석인 루시(Lucy)부터 로맨스 상징물로써의 타지마할, 윌리엄 호가스의 진 골목처럼 공간도 다룬다. 말 그대로 여성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다시 훑어보는 듯하다(단, 이 책에서의 주요 공간적 배경은 영국이다). 일례로 편에서 속박, 지배, 복종에 관한 관심이 포르노그래피로 발현되는 문화적 구조를 짚어냈는데, 기존 역사 평가에서 '호텐토트의 비..
-
길 잃기 안내서책과 영화 2023. 8. 30. 17:30
석사과정 때 친구로부터 이 책을 선물 받았다. 당시 우리가 방문했던 독립서점에서 큐레이션 한 책 중 하나였고, 친구는 별 뜻 없이 내게 선물했던 것 같다. 책을 받고 나는 엄청 뜬금없는 책이라고 생각했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에서 길을 잃으라니, 게다가 안내서까지 들고 길을 잃는다는 게 말이나 되나? 그리고 박사과정, 예비심사 후 길을 잃었고 뜬금없이 이 책이 눈에 들어와 다시 읽었다. 우리는 때때로 길을 잃을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살다보면 내가 가는 방향을 부정당할 때가 온다. 길을 잃으면 사람은 당황하게 되고 포기하고 싶어 진다. 그럴 때 『길 잃기 안내서』가 필요하다. 우리가 익히 아는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에도 '길 잃기'가 있었다. 1527년 스페인 국왕의 후원 아래 알바르 누네스 ..
-
나혜석의 고백책과 영화 2023. 8. 16. 18:39
'일제강점기 최초의 여성 화가', '이혼녀', '가정과 시대에게 버려진 여성' 모두 나혜석과 연관있는 수식어들이다.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은 물론이고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개인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성공한 여류 화가가 어쩌다 비운을 만났을까? 이혼으로 고통받았다던데, 그녀에게 어째서 이혼이 고통이었을까? 『나혜석의 고백』은 그녀의 산문과 대담, 논평 가운데 여성권을 비롯해 진보적인 관점에서 쓴 글을 묶은 책이다. 나는 조일동이 엮고 이다북스에서 2021년에 출간한 서적을 읽었다. "조선 여자도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겠소" 나혜석은 소위 '엘리트 코스'라고 부를만한 교육 과정을 거친 신여성이다. 부족함 없이 자란 성공한 여성 화가로 보인다. 그러나..
-
가치를 전달하는 글쓰기: 리뷰 쓰는 법책과 영화 2020. 4. 23. 17:21
내가 근래에 이렇게나 잘 읽은 책이 또 있던가? A4 절반이 채 되지 않는 크기에 300페이지 내의 분량인 단행본이다. 표지에 적힌 것처럼 '가치를 전하는 비평의 기본기'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가와사키 쇼헤이는 누구일까 궁금해졌다. 가와사키 씨는 이전에 자비로 『중쇄 미정』이라는 책을 출판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편집자로서 겪는 어려움과 출판시장에 관한 내용이다. 『리뷰 쓰는 법』에서는 누구나 다채롭게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독려하고 있다. 이러한 독려는 내가 책을 '잘 읽었다'고 느낀 지점이다. 그는 단순히 글쓰기에 관한 기술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가 글쓰기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글 쓰는 사람의 가치관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비평가의 시선과 태도이다. 이 책을 읽은 후에 나는 ..
-
폴란드로 간 아이들책과 영화 2019. 12. 25. 19:01
개요: 다큐멘터리, 드라마 ㅣ 한국 ㅣ 79분 ㅣ 2018.10.31 개봉 감독: 추상미 2019년 12월 25일 성탄절, 다른 학생들은 다 나가고 나 혼자 기숙사에서 다큐멘터리를 봤다. 기적같았던 12월 24일의 석사학위논문 심사를 마치고 이러저러한 조교 업무도 마치고 깜빡 잠이 들었다 깨니 성탄절. 할 일이 더 남았지만 심사 통과를 자축해야겠다는 마음이 생겨 넷플릭스부터 켰다. 석사과정 내내 속세를 멀리하겠다고 꾹 참았던 영화! 성탄절 축하와 나 자신을 응원하는 영화로서 을 선정한 셈이다. 추상미 감독은 폴란드 소설 를 보고 폴란드의 북한 전쟁고아 이야기를 영화화해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루터기'라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배우를 모집했고, 새터민 지원자들이 많았다. 추상미는 영화 리서치를 위해 폴란드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