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삶과 관련된 물건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적 역할의 변화상을 살펴본다. 구체적으로는 선사시대부터 전통사회, 산업혁명 시대, 현대에 걸쳐 여성의 삶에 각 물건이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섹슈얼리티, 가정, 산업, 문화, 예술, 노동 등 다방면에서 다룬다. 대개는 여성의 역사와 관련된 물건이라고 했을 때 공예품이나 조리도구 정도를 떠올리지만, 이 책에서는 최초의 여성 화석인 루시(Lucy)부터 로맨스 상징물로써의 타지마할, 윌리엄 호가스의 진 골목처럼 공간도 다룬다. 말 그대로 여성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다시 훑어보는 듯하다(단, 이 책에서의 주요 공간적 배경은 영국이다).
일례로 <포르노그래피와 여성의 대상화 - 호텐토트의 비너스 엽서>편에서 속박, 지배, 복종에 관한 관심이 포르노그래피로 발현되는 문화적 구조를 짚어냈는데, 기존 역사 평가에서 '호텐토트의 비너스(Hottentot Venus)' 사건은 유럽의 제국주의와 인종차별을 논하는 사례로 다루어진다. 이 사건은 코이코이 부족(호텐토트 부족) 여성인 사르키 바트만(Sarah Baartman)은 1810년에 납치되어 신체적 생김새가 신기하다는 이유로 유럽 이곳저곳을 다니며 전시되었던 일이다. 이 일로 끝나지 않고 그녀의 몸은 해부를 포함하여 도판, 사진, 심지어 모형으로까지 기록되어 세계에 박제되었었다.
이러한 유럽의 기이한 '관람 문화'는 애초에 17세기부터 프릭쇼(freak show)를 통해 널리 퍼져왔었다. 프릭쇼는 산업과 전쟁으로 인한 기형적 신체 소유자들(샴쌍둥이, 키가 자라지 않는 남자, 고릴라처럼 털이 수북한 여인, 육손이 등)을 광대로 삼아 구경하고 즐기는 이벤트이다. 단순 호기심, 신기함을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인간을 구속하고 사물화 하여 쾌락까지 즐기니 너무나 폭력적이고 변태적인 '관람 문화'이다. 다시 사르키 바트만의 신체 도판, 사진, 모형 이야기로 돌아가 - 이 모든 기록물 자체가 포르노그래피와 다를 바 없다고 여겨진다.
<플레시오사우르스 화석>편도 인상 깊다. 제목만 볼 때는 여성의 삶과 화석이 대체 어떤 연관이 있을까 하는 의문점이 생긴다. 메리 애닝(Mary Anning)이라는 화석 전문가의 이야기인데, 그녀는 어떤 과학적 교육도 받지 않은 평범한 여자다. 플레시오사우르스(Plesiosaurus)는 이 평범한 여자가 1810년에 발견한 화석 중 하나이고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매일같이 화석을 발견하고 수집하여 생계를 위해 판매했었다. 그녀가 살던 시대는 19세기 초반인데 당시 지질학이나 고생물학 분야의 연구는 초기 단계였고 많은 연구자와 전문가들이 그녀의 화석을 구매하여 논문까지 발표했다고 한다. 메리 애닝은 수백 개의 가치 있는 화석들을 한눈에 발굴할 수 있었고 그 상태를 면밀하게 해석하여 정리까지 할 수 있는 완전한 전문가였다. 그러나 그녀가 저명한 교육 기관에서 학위를 받은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메리 애닝의 업적이라고 할 수 있는 타당성이 마련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당시 그녀의 화석을 토대로논문까지 발표했던 연구자 및 전문가들은 그녀의 교육 이력 때문에 화석의 진위 여부를 신뢰하지 못했다고 한다. 놀랍게도 메리 애닝의 화석들은 훗날 진화론의 기초가 되었고, 현재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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