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 최초의 여성 화가', '이혼녀', '가정과 시대에게 버려진 여성' 모두 나혜석과 연관있는 수식어들이다. 경기도 수원의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고등 교육은 물론이고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와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개인 전람회를 열기도 했다. 성공한 여류 화가가 어쩌다 비운을 만났을까? 이혼으로 고통받았다던데, 그녀에게 어째서 이혼이 고통이었을까?
『나혜석의 고백』은 그녀의 산문과 대담, 논평 가운데 여성권을 비롯해 진보적인 관점에서 쓴 글을 묶은 책이다. 나는 조일동이 엮고 이다북스에서 2021년에 출간한 서적을 읽었다.
"조선 여자도 사람이 될 욕심을 가져야겠소"
나혜석은 소위 '엘리트 코스'라고 부를만한 교육 과정을 거친 신여성이다. 부족함 없이 자란 성공한 여성 화가로 보인다. 그러나 나혜석의 글을 읽을 때는 그녀의 시대에 몰입해야한다. 오늘의 시선으로는 그녀의 주장과 생의 관계를 이해하기 어려우니, 잠자코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상상해보아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나혜석의 기고문 등을 엮은 것이다. 그녀는 화가이기도 하면서 자기 경험을 바탕으로 한 논설을 쓰고 세상에 보이기도 했다. 그 주제로는 여자로서 살아가는 일, 결혼, 사랑 따위였고, 개중에는 임신과 육아의 고통을 담은 <모(母)된 감상기>나 김우영과의 이혼 이야기를 담은 <이혼 고백서>와 같이 굉장히 진솔한 경험담도 있었다. 이 책에서는 오로지 그녀의 경험과 생각, 논고, 비판만이 담겨 있으니 우리는 한 사람의 주장만을 가지고 당시 사회를 상상해보아야 한다. 그러면 역설적이게도 나혜석이 살던 시대에 여성이란 얼마나 주목받지 못하고 그럴 일 없는 사람이었는가 알 수 있게 된다.
나혜석은 조선 여성들이 사회 이목을 두려워하여 마음 편히 취미 생활을 갖거나 교육받지 못한다고 여겼다. 일본 유학에서 서양화를 배우고, 남편과 세계일주도 해 본 그녀로서는 규율이나 제도가 조선 여성들의 개화를 가로막는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글에서처럼 누구는 삼종지도를 지키며 제 도리를 다 하려 노력하고, 나혜석은 단발하고 아이스크림을 맛본다 하니 그 차이가 어땠을지 상상이 된다. 1920~30년대(나혜석의 기고문 발표일자 기준) 여성들과 나혜석은 집안 배경부터가 달랐으니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천차만별일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나혜석은 이러한 경험의 차이는 단지 재물 탓이 아니고 우리 사회에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여자도사람이외다" 라고 말하며 한 인간으로서 교육도 받고 공부해 사업도 해보고 더 넓은 세상에 가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성을 인간으로 여겨달라는 그녀의 바람. 그녀의 바람이 너무 거셌는지 혹자는 그녀를 너무 과격한 선동자로 보기도 했다. 일례로 나혜석은 시사 주간지 《동명》에 <모(母)된 감상기>를 발표한 일이 있는데, '백결 선생'이라는 필명의 남성이 <관념의 남루를 벗은 비애>라는 글을 통해 나혜석의 생각과 주장을 비판했다. 그리고 이후에 나혜석이 <백결 선생에게 답함>으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글을 발표하였다. 당시 이런 방식의 글 주고받기가 허용되는 분위기였는지는 모르겠다. 여성 작가가 자신의 임신·육아 고뇌를 공개적으로 표현하는 일도 놀라운데, 심지어 익명의 남성이 발표한 비평문에 답변까지 발표했다는 점도 놀랍다. 게다가 <백결 선생에게 답함>에서 나혜석은 '백결 선생'의 비평 방식과 내용을 노골적으로 비판하였다. 가령, 나혜석은 자신의 심정과 경험을 토대로 글을 발표했을 뿐인데, 백결 선생은 '신여성'이라는 단어를 앞세워 마치 신여성들이 모두 나혜석과 같이 불손한 태도를 지녔다는 것이다. <백결 선생에게 답함>에서 나혜석은 자신이 물론 조선 여성과 신여성을 대표하고자 함도 아니었고 임신·출산·육아에 관한 자기의 고뇌, 고통은 엄마가 되어가는 과정에서 겪는 감정 중 일부에 불과함을 밝혔다
나혜석의 이러저러한 주장 가운데, 내가 가장 공감하는 부분은 사랑에 관한 내용이다. 이 가치관을 이해한다면, 아마도 그녀의 주장을 달리 해석할 수 있겠다. 이 경우의 사랑이란, 단순히 담녀간의 애정이니 연애니 하는 뜻이 아니고 정신적이고 인류애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쉽게 말하면, 남녀간 특히 부부간 관계에는 존중과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남편 된 사람이 아내 된 사람을 인격적으로 사랑해주어야 가정이 바로 설 수 있다는 뜻이다.
나혜석의 삶을 읽다 보면 화 나는 부분이 더러 있다. 그녀의 주장에 과몰입하여 화가 날 때가 있고, 그녀의 이혼 과정이 어이없어 화가 난다. 집안이 어려워 시모와 시누이 등을 챙겨야했던 상황에서 김우영이 나혜석을 나무란 일, 나혜석이 김우영과 부부간이었음에도 파리 여행 중 만난 최 린과 연애를 한 일, 그러면서 '다른 남자를 만남으로 인해 남편에 대한 애정이 두터워진다'고 말한 일(어디서 온 생각일까?), 이혼을 요구한 김우영이 첩과 딴 살림 차린 일, 나혜석이 그 첩을 찾아가 삼자대면을 한 일... 나혜석이 겪은 일, 정확히는 『나혜석의 고백』 이 책에 나열된 사건들을 읽으며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마치 나는 탁구공처럼 이 사건에서 놀라고 저 사건으로부터 얻어맞고 정신이 없었다. 나에게도 충격인데, 나혜석과 동시대에 살며 그녀의 이혼과 위자료 청구소송 등을 기사로 접한 당대 사람들은 얼마나 기함할 일이었을까? 실제로 나혜석은 일련의 사건들로 인하여 '불륜녀', '이혼녀', '음란녀' 등으로 낙인찍혔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는 나혜석을 어떤 틀에 가두어 읽고 있는가 생각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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