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틀 뒤는 성탄절이고 아홉 번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백화점에서는 연말을 위한 음식, 장식, 물건을 팔고 SNS에서는 파티 공간과 음악을 마구 추천해 준다. 구경하는 일만으로도 들뜨게 되는 연말! 나도 가담하여 연말을 풍요롭게 보낼 수 있는 영화를 추천한다.
※ 로맨틱 코미디, 귀여운 애니메이션, 따뜻한 가족 드라마 아님. 세상에 대한 회의감 또는 비관적 생각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니 주의하기 ※
첫 번째 추천 영화 <가버나움>
영화의 첫 장면은 열두 살 소년 자인이 살인미수 죄로 수감된 상태에서 재판을 받는 것으로 시작한다. 자인은 판사를 향해 자기 부모를 고소하고 싶다고 말한다. 판사가 고소 이유를 묻자 자인은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반대편에 앉아있던 자인의 부모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세상 슬픈 표정으로 판사에게 억울함을 토로한다. 부모는 평범해 보이고 자인 얼굴에는 분노와 슬픔이 섞여 있다.
스포일러 없는 간략 줄거리
자인이 열두 살이라는 사실은 교도소 의사 소견에 의한 추정 나이일 뿐 출생신고 이력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다. 부모 또한 자인의 생일을 알지 못한다. 놀랍게도 자인에게는 동생이 줄줄이 있다. 말 그대로 '줄줄이' 있어 집 안에도 아이들이 바글바글하고 자인이 일 하러 나갈 때는 형, 누나 구성원만 동행하는 것 같은데도 우르르 몰려다닌다.
모종의 사건으로 자인은 가출을 하고 불법 체류자 라힐과 그의 아들 요나스를 만나 함께 생활하게 된다. 신분을 증명할 수 없는데다 요나스의 생물학적 아버지가 책임을 지지 않아 라힐은 청소 일을 하며 생계를 유지한다. 라힐이 일하는 동안 자인이 요나스를 돌보며 셋은 그럭저럭 공생하는 듯 보인다. 그러다 어느 날 라힐이 불법 체류 문제로 수감되고, 아무것도 모르는 자인은 요나스와 라힐을 기다리다 설상가상으로 집에서 쫓겨나게 된다.
2018년 개봉한 이 영화는 레바논 베이루트의 빈민가를 배경으로 한다. 라딘 라바키 감독 또한 레바논 출신이고 그녀는 영화 속에서 변호사로 등장하기도 한다. 열두 살 소년인 자인은 실제로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던 시리아 난민이었고 칸 영화제 수상 일주일 전까지도 법적 출생 기록이 없는 상태였다고 한다.
두 번째 추천 영화 <파이란>
어릴적 내 친척오빠의 방에 <러브레터> 영화 포스터가 크게 걸려있었고 오빠는 그 영화가 너무 슬펐지만 완벽한 로맨스 영화라고 했었다. <파이란>이 내게 너무 슬프면서 완벽한 로맨스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파이란> 포스터에 "세상은 날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날 사랑이라 한다"라는 문구는 왠지 마초 냄새 가득한 B급 로맨스 영화를 떠올리게 하지만,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자와 남자가 한 번도 만나지 않는 이상한 로맨스 영화다.
2001년 개봉했고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으로 알려지기도 한 송해성 감독의 영화이며, 아사다지로의 <러브레터>를 원작으로 제작했다고 한다. 파이란은 영화 속 여자 주인공인 강백란의 중국 이름이고 하얀 난초꽃(白蘭)이라는 뜻이다. 하얗고 가느다랗고 연약할 것 같은 느낌의 이름인 데다 장백지 배우가 풍기는 청초한 분위기가 더해져 강백란 캐릭터가 완성된 것 같다. 최민식 배우 캐스팅은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다. 삼류 건달 이미지를 잘 소화하는 데다 연기력이 뒷받침해주니 서사까지 완성되니까!
연말에는 보통 마음이 훈훈해지고 눈물을 글썽이게 하는 감동적인 영화를 추천한다. 미적으로 아름답거나 미장센이 훌륭한 영화, 아니면 팝콘 무비 등 추천할만한 영화는 차고 넘치지만 나는 왠지 울컥하고 눈물 쏟게 만드는 이야기가 더 끌린다. 상처와 절망 속에서 허울뿐인 희망에 함박웃음 짓는 모습이 더 값지게 느껴진다. 호화로운 별장에서 사랑에 아파하고 극복하는 장면보다 이강재가 파이란 편지 읽으며 오열하는 장면이 더 좋다고 난...
그런 의미에서 눈물 폭발 영화를 한 건 더 추천하고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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