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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디아스포라 기억의 요람, 《간도사진관 기억의 기록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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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obaoJing 2023. 10. 5. 1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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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9월 1일 인천관동갤러리에서 열린 <간도사진관 기억의 기록展>이 10월 1일부로 끝이 났다. 중국 조선족(재중동포)의 모습을 촬영하고 그들의 사진을 수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의 전시다. 전시 연계 특강으로는 류은규의 작업 이야기를 소개하는 "옛 사진과의 만남으로 이어진 간도사진관 작업", 일제강점기 여성독립운동가를 연구하는 이윤옥 선생(한일문화어울림연구소장)의 "간도에서 활약한 여성독립운동가를 아시나요?" 주제가 있었다.

류은규에 따르면, '간도'는 우리 민족이 거주했던 지역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지도에서 찾아볼 수는 없다고 한다. 그는 헤이룽장, 랴오닝, 지린 등 중국 동북 삼성(만주 지역)을 지칭하는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용했다.
류은규는 1993년부터 중국 동북 삼성을 다니며 중국 조선족 모습을 촬영하거나 역사의 증거가 될 자료사진, 기념사진 등을 수집해 왔고, 이를 바탕으로 한 전시를 여러 차례 개최하여 한국 디아스포라의 일면을 대중에게 알려왔다.

이번 전시는 류은규가 1997년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일대의 사진관을 통해 수집한 해방 전부터 1980년대까지의 사진 자료로 구성되었다. 류은규는 개인을 통해 사진을 수집하기도 하지만, 이번에는 사진관 중심으로 수집한 아카이빙이라고 할 수 있다. 사진관을 수집처로 삼은 점이 몹시 인상적이다. 개인에게는 사적인 기록물일 수 있으나 큰 역사로 보았을 때 생활사 혹은 민족사의 퍼즐 일부가 된다. 그리고 사진관은 이러한 퍼즐을 자료로 가지고 있는 아카이브인 셈이다.


<간도사진관, 기억의 기록展> 전경, 인천관동갤러리 1층

누구나 가족사진, 기념사진을 가지고 있지만 어느 순간이 되면 태우거나 버린다. 류은규가 수집한 사진들 또한 개인의 기록물이고 버려질 수도 있는 사진들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진들을 한데 모아 분류하고 이야기를 찾아 주제화한다면 역사와 연결되는 지점이 생긴다. 다시 말하면 류은규는 한국 디아스포라 역사의 '중국 조선족'이라는 큰 퍼즐 조각을 찾았다고 할 수 있다.

간도에 있는 사진관이더라도 중국 특성상 국영화이기에 사진마다 배경, 요소 면에서 중국 문화의 특징들이 두드러진다. 대표적인 사례로는 모택동 어록을 들고 찍거나 공산당과 국민당 '국공내전' 때의 도강을 재현한 배 패널 사진(아래의 좌측 사진)이 있다. 이러한 사진 속 기호를 통해 당시 사람들이 자신의 기록에 함께 남기고 싶어 했던 문화적 요소를 찾아볼 수 있다. 기본적으로는 사진관에서 '이런 배경의 기념사진을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다!'라는 식으로 기획했으리라 추측해 본다. 한국에서 바디프로필 촬영이나 배경 색감이 특징인 프로필 사진이 유행하는 일과는 전혀 다른 맥락이어서 흥미롭다. 

전부 오리지널 필름이고, 사진에 맞춰 액자를 손수 구했다고 한다. 따로 복원 작업을 하지도 않았는데 사진들이 전부 선명하더라. 

<간도사진관, 기억의 기록展> 전경, 인천관동갤러리 1층

우측 사진은 민족교육을 주제로 한 사진 모음이다. 갑자기 웬 민족교육인가 싶겠는데, 기념사진 단골은 학교 단체 사진이 아니던가? 학생 구성원이 일렬로 모여 찍은 일반적인 단체 사진이 있는가 하면, 여러 단체를 따로 찍어 하나의 필름으로 만든 합성 사진도 있다. 이 또한 당시 간도사진관의 합성 기술과 학교 사진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압록강 건너'라는 말을 들어본 적 있을 것이다. 병자호란 때 조선인이 납치되어 압록강을 건너갔던 일이 중국 조선족의 시초라고 알려져 있다. 이후에도 자연재해나 전쟁 등 갖은 이유로 두만강 인근에 조선족이 이주하게 되었고 그 수가 점차 증가하여 해방 무렵에는 인구가 215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류은규, 도다 이쿠코, 『동주의 시절』, 도서출판 토향, 2022, p.11).
일제강점기에도 중국으로 이주하는 조선인이 많았는데, 가족단위로 이주하거나 그곳에서 살며 아이를 낳게 되어 교육 문제가 시급했었다. 이에 민족지도자들이 뜻을 모아 교육 과정을 계획하고 교회 공간 등을 빌려 민족학교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간도는 일찍이 민족교육의 요람이었다"라고 한다. 1900년 김약연 선생이 북간도로 건너가 1908년에 명동학교를 세웠고 윤동주도 이 학교를 다녔다. 갈색 프레임 사진 속 흰 옷을 입은 남자가 김약연이고 그는 윤동주의 외숙부이기도 하다.


서체가 명조여서 그런가 정보가 많아서 그런가 너무 진지한 것 같지만 전시 현장은 굉장히 아기자기하고 사진마다 재미있는 요소가 많았다.

재미있는 요소 중 하나는 컬러 사진! 중국에는 1970년대 이후에나 컬러 사진 기술이 보급되었다는데, 그전까지는 흑백사진에 붓과 유화 물감 등을 사용해 색칠 작업을 했다고 한다. 몇 가지 색이 퇴색되었지만 빨강, 자주, 노랑, 연두색(왠지 RGB...)은 아직까지도 쨍하게 색을 띠고 있다.

우측 사진도 흥미로운 점이 있다. 가까이서 여자들 얼굴을 하나하나 자세히 보던 내게 류은규가 "가까이 말고 멀리서 봐요. 무슨 상황인 것 같아요?"라고 수수께끼를 냈다. 그제야 사진이 다시 보였다. 아기를 안은 여자와 아닌 여자들이 어떤 이유로 함께 사진을 찍었는가 궁금해졌다. "애국부인회 같은 목적으로 찍었나요?"라고 물었더니 "그렇지. 그런데 그거 말고 다른 거(웃음). 바닥을 봐" 바닥을 보자마자 나는 화들짝 놀랐다. "아이 소변(웃음)이에요. 사진 찍는 도중이어서 어머니는 가만히 있었던 거야. 어머니가 놀라면 아이가 경기를 일으키거든!"
류은규는 내게 수수께끼를 낼 때 조심스럽게 기혼 여부를 물었는데, 거기에 힌트가 있었다. 아이가 없으니 나는 모르는 일. 당시의 사진 촬영은 사진가의 기획과 연출, 조도와 인물 배치 조정, 가구와 집기 활용 등 여러 절차를 거쳐야 했다. 게다가 기념사진은 특별한 이유와 목적이 있으니 섬세한 작업이 필요했다. 오로지 단 한순간을 위해 모든 걸 기획하고 추측하고 협력해서 만들어내는 결과물이다. 그러니 아기 소변이 치마를 물들여도 여자는 아무 미동도 할 수 없던 일이지. 정말이지 아이 얼굴까지 평온하니 나는 아무런 눈치를 챌 수 없었던 묘한 사진이다.


갤러리 2층에는 류은규가 직접 촬영한 사진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내가 처음 류은규를 만난 <잊혀진 흔적> 전시의 작품들이자 내가 가장 애정하는 작품들이다. 1993년 10월 헤이룽장성 하얼빈에서 생활하며 독립운동가 후손이나 증언자를 찾아다녔고 그들 모습을 촬영하거나 그들로부터 사진자료를 받으면서부터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류은규가 찍은 독립운동가 혹은 후손, 인천관동갤러리 2층

한복 입은 할머니는 양세봉 장국의 셋째 제수인 김화순 할머니다. 양세봉 장군은 남만주 지역에서 활동했고 중국 조선족에서 영웅으로 알려진 사람이다. 해방 후 김일성이 양세봉의 가족을 후대했고 우리나라에서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김화순 할머니는 양세봉 장군 부인과 함께 고생하며 살았는데, 류은규가 찾아가 보니 아무 곳에서 대우받지도 못하고 어려운 삶을 살았더랬다.
류은규 설명에 의하면 김화순 할머니는 역사의 흔적을 혼자 근근이 지키며 살고 있었다고. 사진을 찍기 위해 한복으로 갈아입었다고 했다.


<잊혀진 흔적>, 인천아트플랫폼, 2019

내가 가장 처음 매료되었던 류은규의 작품 두 점이다. 2019년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열린 <잊혀진 흔적> 전시였고 당시 2019년은 3.1 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으로 전국의 역사박물관과 갤러리가 떠들썩했었다(그렇지만 류은규 자신은 이 해를 위해서만 작업하지 않았다고).

전시장 입구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면이다. 대조되는 이미지의 두 여성의 사진이 나란히 걸려있다. 좌측에는 황야의 노파가, 우측에는 풍성한 나뭇잎 너머로 단정한 모습의 여인이 서있다.

좌측은 조선혁명군으로 활동한 김규식 선생의 딸인 김현태 할머니다. 김현태 할머니가 류은규에게 김규식 선생이 묻힌 자리를 안내했고 할머니는 아마도 자신이 아버지 무덤을 찾아올 마지막 날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류은규는 바로 카메라를 들어 김현태 할머니를 촬영했다.

우측은 리민 여사. 중국 조선족 여성으로서 최고 직위까지 올랐던 사람이다. 항일투사이고 소련에서 김일성과 같은 부대에 있었으며 해방 후 국빈급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촬영 당시의 그녀는 72세였다고 하는데, 최고 투사였다는 말이 믿기지 않을 만큼 단아하고 평온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류은규와는 내가 석사시절 조교하던 때 2019년에 만났다. 연구실에서 한창 AR 역사콘텐츠와 씨름을 했고 독립운동과 대한민국임시정부 관련 전시는 모조리 찾아다녔더랬다.
때마침 인천아트플랫폼의 <잊혀진 흔적> 전시 소식을 접했고 바로 달려갔다. 정형화된 역사박물관 사료에 질리던 차에 너무나 재미있는 전시가 아닐 수 없었다. 다큐멘터리 사진가가 직접 발로 뛰어 역사의 후손과 증언자들을 촬영하고 그들로부터 받은 사진이라니! 사료(使料)를 죽은 자료(死料)로 만든 역사박물관에 비해 류은규 사진들은 너무 생생했다.
전시장에 류은규가 있었고 나는 바로 인사와 함께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즉흥적으로 특강을 제안했더니 흔쾌히 응해주었다. 우리 프로젝트에서 한 번의 특강이었지만 핵심적인 영감을 준 강의였다. 청학동 사진기록과 춘천교도소 사진기록 프로젝트 사례, 그리고 자신이 중국연변조선족의 흔적을 추적하게 된 이야기 등을 풀어주었다.

그리고 2023년 우리는 다시 만났다. 2019년 당시에 류은규가 기록집에 관한 계획을 어렴풋 언급했던 기억이 있다. 자신이 사진가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기록을 모으는 사람으로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하고 싶다는 계획을 내비쳤었다.
2020년 전염병 문제로 인해 중국에 가기 어려워졌고 그는 당시 머리와 가슴에 품었던 계획을 실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5만여 점이 넘는 사진들을 한 장 한 장씩 직접 손수 스캔했단다! 돈을 주고 맡겨도 되지만 직접 발로 뛰어 그 맥락과 가치를 잘 아는 자신이 직접 스캔을 해야만 했다고. 그렇게 한 땀 한 땀 만든 결과가 간도사진관 시리즈다.

우리는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었다.
류은규는 내게 사진을 배우라고 재차 강조했다. 사진을 꼭 배워야 한다고. 인간은 선사 때부터 그림, 글자, 사진을 도구로 삼아 자기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어 하는데 오직 인간만이 그렇게 하며, 글자에 비해 사진은 그 역사가 200년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사진 기술이 발명되기 전까지(사실은 최근까지도) 글자가 기록의 권력을 쥐고 있었지만, 류은규 생각에 오늘날에는 사진이 그 권력을 뒤집었다고 한다. 짧은 역사를 가졌음에도 사진의 영향력은 엄청나다고!
글은, 언어는 문법과 문맥 그리고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통번역 되어야 한다는 한계가 있으나 사진은 그렇지 않다. 직관적이면서 시간과 공간의 순간을 담아낼 수 있다. 사진이 글의 보조역할일 때도 있지만, 몇 줄의 문장보다 사진 한 장으로 인해 마음이 움직일 때도 있다. 따라서 류은규 자신의 작업은 단순히 셔터를 누르는 '찍사' 개념이 아니고 사진 사관(史觀)을 만드는 일이라고 말했다. 사진 촬영 기법은 누구든지 가르칠 수 있고 아마추어도 사진을 정말 잘 찍지만, 사진을 찍는 이유와 목적을 배워야 한다고 다시 강조했다. 류은규 자신은 "사진을 가르치지 않으면서 사진을 가르친다(웃음)"면서.

기대 없이 방문했다가 우연히 다시 만나 너무 반갑고 영광인 시간이었다. 류은규가 했던 말들 모두 내 삶에 표지판이 되었다. 그는 "2019년 강의했던 때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책 작업 하면서 성장했다"라고 말했고, 내가 "저도요"라고 답할 수 있어서 기뻤다.


10월 내에 제주 4.3 사건을 주제로 한 전시를 새로 개최할 예정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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