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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오래된 물건으로부터 읽는 문화와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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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문화인류학 관련 강의에서 <칼의 역사>에 관해 들었다. 인류 역사상 최초의 칼이 주먹도끼이고, 시대를 거쳐 현대에는 얼마나 강력한 무기로 변했나 하는 주제였다. 내용은 이렇다.

금속 기술이 생기며 청동칼을 만들 수 있게 되었고 철기 문명 시대에는 오늘날 칼의 소재와 생김새가 유사한 창, 검이 생겨났다. 산업화가 시작되고 주방 문화가 발달하면서 식칼이 보급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칼은 얼마나 세련되고 정교해졌을까? 바로 엽떡 플라스틱 그릇의 비닐을 뜯는 3cm 남짓의 플라스틱 도구다.

뻔한 결말이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듣다가 완전 뒤통수 맞은 것처럼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이번에 소개 할 책은 박현택의 『오래된 디자인』(2013)이다. 최근에 국립박물관 문화상품에 대해 연구하다 박현택이라는 선생님을 접하게 되었다. (책이 아닌 인터뷰 기사로 먼저 접했으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겠다) 박 선생님은 홍익대학교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하고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디자인 담당으로 30년간 일하셨다. 이 책의 서두에는 경계인의 삶에 대해 자조하며 슬퍼하던 차에 글쓰기를 권고받아 책을 내셨다고 쓰여있었다. 적어도 나는 연구자로서 그가 걸어온 길이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감각 충만한 디자이너도 반듯한 관료도 아닌 경계인"으로 업을 행하는 과정에 고민이 많았다고 하시니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공감되었다. 그만큼 박 선생님이 일하던 때는 이것이 생겨나고 저것이 변하면서 박 선생님 같은 사람들을 경계로 몰아갔던 걸까? 실제로 90년대에는 한국에 막 디자인이라는 분야가 생겨나고 확장했단다. 국립중앙박물관에는 99년부터 디자인팀이 신설되었다.

오늘날 흔히 "전시 굿즈"라고 불리는 것이 바로 박물관 문화상품이다. (미술관, 갤러리 상품도 있지만 오늘은 박물관을 중심으로 다뤄보자) 기성품이나 갤러리 상품과 달리 박물관 문화상품 디자인에는 유물의 상징성과 역사성이 반영되어 있다. 유물의 형상이나 문양을 따서 디자인으로 응용한다고 하면, 단순한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전혀 아니다. 자개를 예로 들어보자. 영롱한 자개는 나전 기법으로 만들었는데, 그 영롱함을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공책이나 휴대폰 케이스에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 기술력을 확보했더라도 시제품 개발과 양산, 유통의 문제도 있다. 디자이너가 대충 누끼 따서 인쇄하면 끝나는 일이 아니란 말이다.

여담으로, 오래전에 비엔나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굿즈를 찾아 헤멘 일이 있었다. 그의 작품에서 가장 상징적인(그리고 내가 매료된) 우아한 색감과 금박이 표현된 굿즈를 사고 싶었다. 그러나 웬걸 냅다 인쇄한 엽서, 펜, 공책, 파우치, 포스터, 머그컵뿐이었다. 지루한 제품군은 둘째치고 작품 특성에 대한 이해도가 전혀 없어 보이는 것들 뿐이었다고. 결국은 빈손으로 나왔다고.

(좌) 조선시대 나전 가구들, 2024년 한일중 국립박물관 공동특별전 '三國三色-동아시아의 칠기', 국립중앙박물관 / (우) 나전 무늬를 차용한 공책, 국립중앙박물관

 

『오래된 디자인』(2013)은 박 선생님이 경계인으로서, 즉 박물관의 문화상품 디자이너로서 해석한 유물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소개하는 첫 번째 "오래된 디자인"은 조선시대의 서안과 경상, 그리고 코란 받침대다. 경상 끝이 곡선으로 말려있는 이유는 두루마리 책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조상님들의 지혜였고, 박 선생님이 외국에서 우연히 발견한 코란 받침대는 책을 높이 올려드는 모양새였단다.

이 책에는 이런 해석 말고도 박물관 문화상품을 제작하며 겪은 한계와 해결 같은 비하인드 이야기도 있다. 생생한 제작기를 알 수 있어 반가운 책이고, 오래된 물건으로부터 그 시대의 디자인 철학을 읽어낸다는 점이 내게 큰 유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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