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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

바우하우스를 나온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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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여러 시각에서 다층적으로 보는 일은 어려우면서도 꼭 필요한 작업이다. 정부나 역사가가 기술한 역사 말고도 숨은 이야기가 더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서 아를레트 파르주의 『아카이브 취향』이나 카를로 긴츠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보물과도 같다. 평민의 일상, 낮은 계급의 문화 등 사회 주변의 것들을 모아 역사의 빈 부분을 메꾼다.
아마도 '여성'은 역사에서 빈 부분 중 가장 크고 중요한 퍼즐 조각일 것이다.


2019년은 바우하우스 개교 100주년이었고 기념 활동 중 안그라픽스에서 안영주의 『여성들, 바우하우스로부터』를 발표했다. 책의 부제목은 "축소되고 가려진 또 하나의 이야기"다.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하고 활동한 7인의 여성 디자이너를 소개하고 그들 작업이 오늘날 디자인, 공예, 미술, 사진, 일상 문화에 미친 영향을 재해석한다. 서문에서 안영주가 서술 방식의 오류를 주의하겠다고 밝힌 점이 인상 깊다. 남성에서 여성으로 치환한 채 위인전 같은 일대기식 서술을 그대로 답습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여성 디자이너들을 조명하여 무엇을 밝히고 싶었나?


디자인과 학생 혹은 디자이너라면 익히 알고 있는 바우하우스. 독일의 근대적 종합미술/디자인 학교였고 미술, 공예, 사진, 건축 등을 교육했으며 1919년부터 1933년까지 운영되었다. 건축가 발터 그로피우스가 설립했고 교수진으로 바실리 칸딘스키, 요하네스 이텐, 루트비히 미스 반데어로에 등 근대 미술/디자인에 획을 그은 유명인들이 있었다.
바우하우스의 학생들 모두 여성, 남성 할 것 없이 이러한 유명인들로부터 교육받았다. 같은 과목, 같은 실습실에서 연구했다. 바우하우스 설립 초기에 여성 비율이 더 높았다는 점은 놀랍기까지 하다. 그러나 1920~30년대 당시에는 여성이 실용 목적으로 미술/디자인 학교에 입학하는 일 자체가 어려웠고 산업, 건축 등의 중요한 분야는 남성의 몫이라는 인식이 만연했다. 바우하우스 교육 체제에도 성 차별적 지점이 있었다.
일례로 키티 피셔(Kitty Fischer)는 건축을 공부하려고 1929년 바우하우스에 입학했고 6개월 간의 예비 과정까지 마쳤다. 그러나 그의 제품이 장식적이며 구축성이 없다는 부정적 평가를 받았다. 키티 피셔는 이 평가를 받고서야 이러한 기준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데, 그 기준이 중요한 대목이라면 어째서 그의 예비 과정 동안 거론되지 않았는지 안영주는 의문을 제기한다.
과거 사회에는 남녀 활동에 관해 이원론적 사고가 깔려있었다. 남성은 구조적이고 건설적인 일이 적합하고 여성은 장식적이고 섬세한 일에 적합하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인식이 사회에 뿌리 깊게 박혀있다 보니 활동에 있어 성별에 의해 타자화하고 구분 짓기를 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기회가 된다면 프리들 디커 브랜다이스의 생애를 연구해보고 싶다. 아쉽지만 국내에 아직 번역서나 연구 기록이 없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이고 공산주의자이고 바우하우스에서 수학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테레진 수용소에 있다가 아우슈비츠로 이송된 후 죽음을 맞이했다. 테레진 수용소에 있을 때 비밀리에 아이들을 위한 그림 수업을 운영했고 명화 작품을 재해석해 그려보게 하는 방식이었다. 따라 그릴 수 없게 잠깐 동안만 보여주고 아이들이 자립적으로 창작 세계를 펼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다. 그는 5천여 명의 아이들이 창작한 그림과 시를 두 개 여행 가방에 감췄고 그것이 10년이 지난 후 발견되었다고 한다. 전문가들 평가에 의하면 그의 창의 교육 방식에서 바우하우스 이론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프리들 디커 브랜다이스는 오랫동안 아이를 갖지 못했다고 한다. 아이를 향한 열망과 그가 경험했던 배움의 기쁨이 테레진 수용소에서 발현되었던 걸까? 그의 말이 내 마음에 남는다.

"예술 안에서의 나의 삶은 나를 수많은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주었다. 열심히 연습해 온 그림을 통해 나는 원인 모를 죄책감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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